1896년 5월 26일 크렘린 궁전 안쪽의 우스펜스키 성당에서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이 열렸으며 4일 뒤 호딘카 들판에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잔치가 큰 규모로 열릴 예정이었다.참가자들에게 음식과 기념품이 지급된다는 소문에 새벽에만 무려 5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모였는데 모여든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150개 장소에 뷔페가 차려졌다. 뷔페에선 빵과 소시지, 프레첼, 맥주 3만 통과 벌꿀술 1만 통이 제공됐으며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애나멜 장식의 대관식 기념 잔이 참가자들에게 배포됐다.[1] 10개 장소에 대형 임시 무대도 설치되어 음악과 연극이 펼쳐졌다. 점심이 끝나고 오후 2시엔 니콜라이 2세가 축제 장소에 와 국민들과 어울릴 예정이었다. 문제는 50만 명에 달하는 인원들을 통솔하기 위한 경찰은 고작 1,800명 밖에 되지 않아 인원이 전혀 통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이 부족할 수 있다거나 참가자들에게 경품을 추첨해서 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모여 지쳐 있던 사람들은 음식이 있는 식탁으로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문제는 당시 대관식 기념 축제를 급하게 준비하느라 호딘카 들판은 공사가 덜 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호딘카 들판은 원래 러시아 제국군이 군사훈련을 하며 참호를 팠던 곳이라 여기저기 경사가 있고 높낮이가 심해 넘어지기 쉬웠으며 우물이 있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달려나가던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고 넘어지며 뒤엉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직 메워지지 않은 참호에 빠진 사람들도, 우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찰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을 통제해 보려고 했으나 사람의 수에 비해 경찰이 너무 적어 역부족이었다. 결국 사람들끼리 엉킨 와중에 압사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태가 진정됐을 땐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뒤였다.이 사고로 최소 1,389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기록에 따라 사망자 수는 4,000명대, 부상자 수는 2만 명까지 오르기도 한다. 사망자 중에서는 현장을 간신히 빠져나왔으나 내부 장기 손상이 심해 사고 현장 바깥에서 사망한 사례도 많았다. 이 사고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압사 사고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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